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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필에 필요한 고찰

어째서 웹소설의 빙의, 환생, 차원이동자들은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는가

by FromZ 2022.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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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상업적인 웹소설 작품의 도입부를 쓰는 와중, 나는 크나큰 고뇌에 봉착했다.

 

나는 집필할 때 작중에 등장하는 지성과 대사를 가진 모든 존재의 입장이 되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도입부를 쓰면서 주인공이 되었다. 그랬더니 내 작품 도입부의 주인공이 다른 작품에서 분석했던 주인공들의 행동&감정의 양상과 굉장히 다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실의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완전히 다른 판타지세계(이세계)로 어떠한 형태로든 전이되어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어째서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는가.

 

당연히 내가 판타지세계로 간다고 한다면 재밌을 것이다. 판타지세계로 갔을 때 나에게만 특별한 보너스가 주어진다면 더욱 흥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 세계에는 인터넷도, 현대의 물건도, 서비스도, 각종 재화도, 나의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도, 내가 현실에서 이루어둔 대부분의 결과물들이 없다.

 

당장 내가 판타지세계로 가버린다면 나는 좌절할 것이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애써 부정하고 전혀 기뻐하지도 못할 것이며 현실에 남겨둔 모든 것들을 그리워할 것이다. 아무리 그 새로운 세계가 흥미로워도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러한 장르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처한 새로운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어째서 주인공들은 판타지세계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걸까.

단순히 작가가 작품을 집필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넘어가는 것인가?

독자들이 그런 현실적인 심리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에 배제한 것인가?

나는 그것을 분석해보았다.

 

분석해보니까, 정말로 작가와 독자의 편의를 추구한 것도 있지만 대다수의 인기작들은 그럴 법한 장치를 두었다.


어째서 주인공은 새로운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가?

 

1. 주인공은 잃을 게 없다.

현실에서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당장 내일 판타지세계에 떨어진다고 해도 크게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무궁무진한 기회의 땅에 온 신대륙 개척자처럼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때 주인공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현실에서 정말 노력도 하지 않고 무력감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인간관계조차도 고립된 주인공이다. 다른 하나는 현실의 과거에 노력을 했고 이룬 것이 있지만 오늘에 와서는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려서 크게 낙담하고 있는, 주저앉은 상태의 주인공이다.

최근에는 두 번째 케이스의 주인공이 첫 번째 케이스의 주인공보다 자주 사용되는 편이다. 아무래도 노력하여 성취하는 것을 전혀 모르는 주인공(백수, 일부 취약계층, 일부 장애인, 히키코모리, 외톨이, 트라우마 경험자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이 갑자기 판타지세계로 가서 개과천선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케이스를 해야 주인공에 대한 동정심도 커지는 법이다. 노력도 하지 않던 주인공이 잘 되는 것보다는 노력했으나 무너진 주인공이 잘 되는 게 더 극적이다.

 

2. 새로운 세계에 온 건 이미 지나간 일이다.

이 경우에는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인 주인공의 현재를 먼저 보여준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 막 도착한 과거 주인공의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짧게 정리한 후 넘어간다. 즉,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에 막 도착하여 그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이미 끝난 것이다. 이때 회귀를 섞어서 쓰기도 하고 현재의 주인공에게 확실한 목표를 부여하기도 한다.

 

3. 주인공은 당장 살아남아야 한다.

새로운 세계에 도착한 주인공은 곧바로 위기에 봉착한다. 그리고 당장 살아남기 위해서 새로운 세계의 여러가지 요소들을 활용하고 이 과정에서 자신에게만 주어진 특수성을 확인하게 된다. 살아남을 생각이 없더라도 당장 아프기 때문에 저항하고 도망치고, 당장 배고프기 때문에 돈을 벌고 사냥을 한다. 새로운 세계든 뭐든 당장 살아남기 위한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움직이다보니 주인공은 어느샌가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4. 그냥... 뭔지 알지?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 이유는 딱히 없다.

독자는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를 곧잘 받아들이는 이유를 찾아볼 수 없고 찾을 필요조차 없다. 이때 주인공은 감정의 영역이 희박하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편이다. 혹은 매우 낙천적인 편이다. 이때 작가는 주인공의 거부감에 대한 묘사를 할 분량 대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정을 더 넣는다. 극소수의 독자들만이 주인공의 행보와 상태에 의문을 표하고 절대다수의 독자들은 암묵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이러한 것을 용인한다. 다들 무슨 맛인지 대충 아니까 맛 없는 부분은 빼고 먹자는 인스턴트 같은 느낌이다. 이는 작품 내부에 빠진 부분(설명, 전개)이 있어도 작품 외부에서 작가와 절대다수의 독자들이 합의한 전개이므로 괜찮다는 것이다.


어째서 주인공은 새로운 세계에 쉽게 적응할 수 있게 된 것인가?

 

1. 주인공은 이러한 세계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

주인공은 웹소설을 보는 현대인이었다. 혹은 새로운 세계가 게임이라서 그걸 직접 플레이하는 유저였거나, 그걸 만드는 개발자였다. 어떤 세계든 어떤 방식으로든 주인공은 현대인이었을 당시 그 새로운 세계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사전지식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고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감을 쉽게 잡는다.

 

2. 상태창, 시스템

주인공은 새로운 세계로 오자마자 상태창이나 시스템(이하 상태창)의 존재 및 사용법을 깨닫게 된다. 상태창은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편리하고 매우 강력한 장치다. 그 상태창 하나만으로 주인공은 충분히 빠르게 적응할 수 있으며, 주인공의 적응을 독자들에게 얼마든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3. 특별하고 집중적인 정보 전달의 요소들(빙의, 회귀, 절대자의 설명 등)

새로운 세계가 새로운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면 주인공에게는 그것부터가 엄청난 진입장벽이 된다. 주인공이 현대인이고 주인공의 지능지수가 일반인과 같다면, 유아기를 넘어선 인간은 새로운 언어와 문자를 배우는 일이 매우 어렵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문자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실의 문자 및 언어가 새로운 세계에 없으므로 새로운 세계의 문자 및 언어를 배울 수 있는 편리한 수단 또한 없다. 하지만 주인공은 저마다 특별한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의 언어 및 문자를 배운다.

가령,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로 갔을 때 새로운 인물의 육체에 빙의하고 그 육체(뇌)에 있던 경험과 지식을 그대로 전수받는 경우다. 또는 이미 그 세계에서 충분히 살아간 후 회귀하게 되는 경우다. 또는 새로운 세계로 가기 전 여신이든 관리자든 뭐든 절대적인 존재를 만나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명을 듣거나 필수적인 정보를 한꺼번에 전달 받는다.

위에서 언어 및 문자로 설명했지만 결국 새로운 세계에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정보는 어떤 식으로든 주인공이 얻고 가거나, 새로운 세계에 오자마자 빠르게 습득하게 된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결론

 

이를 통해서 나는 깨닫게 되었다.

절대다수의 독자들은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에 와서 금방 적응하고 활약하는 것을 원한다.

반대로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에 와서 이를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금방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기작의 작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러한 맛 없는 부분을 도려낸 것이다.

 

현재 웹소설 시장에서의 작품을 음식이라고 했을 때, 첫 입을 먹었는데 맛이 없으면 그대로 선택받지 못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따라서 정말 많은 작품들이 첫 입은 무조건 맛있게 만들고 있다. 나중에 그 맛이 질리게 될 리스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첫 입은 맛있고 자극적이고 흥미로워야 하는 것이다. 그런 작품이 더 많은 독자들의 선택을 받았고, 그렇지 못한 작품들은 대체로 선택을 받지 못해왔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첫 입이 맛있는 작품들이 다윈의 진화론처럼 선택압을 받아 압도적으로 더 많이 집필되고 있다. 그렇게 오늘날의 웹소설 시장 트렌드가 형성되었다.

 

나 또한 상업적인 작품을 쓴다면 그렇게 시장에 맞추어 진화된 방식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약 5천 글자의 도입부를 써놨는데, 가만히 읽어보니 주인공이 너무 불쌍하다. 현실에서 이루어둔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갑자기 끌려와서, 며칠을 부정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울부짖고 끝내 자신이 있던 현대의 모든 것들을 그리워하다가 마지못해 생존을 위하여 조금씩 받아들이는 전개다.

 

여기서 상업적인 관점으로 필요한 건 마지못해 생존을 위하여 받아들이는 전개다. 그외에 다른 부분은 첫 입으로서 맛 없는 부분이므로 도려내야 한다. 이전까지의 내 방식, 내가 쓰고 싶은 방식이라면 지금 이대로의 도입부가 맞지만 상업적으로 보면 지금의 도입부는 절대다수의 선택을 받기 어렵다.

 

도입부 다시 쓰자.

물론 주인공의 현실성은 포기하지 않는다. 오늘날 작품 외적인, 암묵적인 약속에 기대고 싶지 않다. 나는 시대, 동향, 유행에 상관 없이 모두에게 잘 읽히는 작품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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