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특한 세계관과 설정 덕분에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반대로 이러한 세계관 특징이 대중적인 선택을 받지 못하는 것에 일조했다.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것이다. 이는 내 작품의 강점이자 약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독특한 세계관과 설정으로 대중의 선택을 받은 대작들이 많기에, 결과적으로 내가 부족했다는 것이 팩트다.
2. 체감상 등장인물이 너무 많았다. 줄이려고 했지만, 인물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전개를 빠르게 하니 등장인물들의 등장과 퇴장 속도도 덩달아 빨라졌고 이는 체감상 등장인물이 너무 많은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3. 집필하면서 각각의 등장인물에게 너무 많은 감정적 공유를 해서 정신적으로 피로했다. 어떠한 인물의 입장에서 대사를 쓰기 위해, 나의 인격은 그때마다 해당하는 인물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잠시 앓았던 해리성 장애 비슷한 그것도 재발할 뻔했다. 선택적인 공감과 이입 능력은 높은 지능의 산물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이를 제대로 조절할 수 없다면 오히려 정신건강에 독만 되고 자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4. 편당 분량이 너무 많았다. 분량이 많으면 좋아할 사람이 훨씬 많겠지만, 너무 많은 분량을 반복적으로 자주 쓰면 보는 이들에게 피로감을 유발하고 해당 편을 다 보았을 때 내용을 전부 기억하기 어려울 수가 있다. 대체로 웹소설은 편하게 틈을 내서 보는 것이지, 책을 읽듯 자리를 잡고 쭉 보는 컨텐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로서 한 편을 집필하는데 쓰이는 시간이 많아지므로 내게도 나날이 피로감이 쌓였다.
5. 복선이 뚜렷하질 않았다. 복선이 많고 세세했다는 건 지금도 자신한다. 고증과 개연성에 집착을 하고 빌드업과 반전을 좋아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대놓고 보이는 복선 외에 세세하게 넣은 복선들은 사람들 대부분이 알아차리지 못했다. 혹은 그런 복선에 대해 반응이 없었다. 이는 작품을 읽는 눈이 다른 인기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심어둔 세세하고 작은 복선들은 대부분이 무의미하게 내 시간만 잡아먹었다는 해석이 된다. 그런 작은 복선들까지 철저하게 설계하는 것도 좋지만, 어차피 읽어도 보이지 않을 복선이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복선을 심을 시간과 노력을 내용 집필에 투입하여 다른 부분의 완성도를 높이거나, 더 많이 써서 연참하는 게 모두에게 이로웠을 것이다. 아니면 작은 복선들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뚜렷하게 써야 했다.
6.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내 작품은 작품성을 높이기 위해 대중성을 살짝 포기했어'라고 조회수를 보며 변명했던 순간들이 있던 것 같다. 그리고 웹소설뿐만 아니라 다른 다른 몇몇 창작물들의 예시를 보며 '저건 양산형이네', '또 저거다', '진부하다'라고 느꼈지만 정작 그런 작품들 대다수가 조회수든 구매수든 더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았고 변함없이 내 작품들을 문자 그대로 압도했다. 감히 나 따위는 명함도 못내밀 정도로 말이다.
가장 신빙성 있는 데이터는 숫자로 표시된 결과라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예술병에 걸려 못마땅했던 걸까. 바보 같다. 내 작품들이 엄청난 작품성을 갖추고 있고 정말 명작이었으면 인기는 당연히 비례해서 따라왔을 것이다. 결국 작품성과 대중성 사이에서의 조율이란 나의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작품성이 좋으면, 대중성은 당연히 따라온다. 양산형이라고 느끼는 요소라도 더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는다면, 그게 더 훌륭한 작품이다. 돌이켜보니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배웠으면서도 이런 당연한 인정을 당시에 진심으로는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절이 싫다면 중이 떠나라는 말이 있듯 이러한 시장의 트렌드가 싫다면 떠나는 게 옳다. 물론 그게 싫어서 떠난 것은 아니고 다른 꿈을 이루기 위해 집필을 쉬게 된 것이지만. 그리고 집필의 가장 주된 목적은 수익이나 명성이 아니었으니 내 색깔을 지우면서까지 트렌드를 따를 필요는 없다. 나는 나대로 하면서 인정할 건 진심으로 인정하고 변명이나 무의식적인 타협은 없애버리는 게 올바른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향후 문학의 시장과 사람들의 입맛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지켜보는 게 중요하겠다. 그래야 언젠가 복귀했을 때 더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
7. 복선뿐만 아니라 작중의 모든 것에, 어찌보면 과도하게 노력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한 이유들을 수없이 만들어두고는 자연스럽게 그 전부를 표현하지 못했다. 100의 개연성을 준비했으면 그중 50의 개연성도 보여주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간혹 어떤 의문을 제기하는 댓글에 지나치게 긴 답글을 달기도 했다. 정말로 모든 것이 납득 가능하도록 설명되어 있고 이해하기도 쉬운 작품이라면 의문을 제기하는 댓글도 없었을 것이며 그런 댓글에 장문의 답글을 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과한 설명, 설정놀이로 변질되는 것을 피하겠다는 마인드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고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설명이 가장 좋은 설명 방식인지 답을 찾기가 참 어려운 것 같았다.
8. 생각할 것이 너무 많은 작품이 되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작품들을 쓴 것이다. 다시 말해, 웹소설로서 수요층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고 너무 복잡한 메시지를 던지려고 했던 것이다. 작품에 녹아든 진중한 메시지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 메시지가 너무 많거나 너무 심오할 경우 오히려 읽기 힘들고 거부감만 생기는 법이다. 심지어 그런 건 극장이나 영화관이나 두꺼운 책에 더 어울리는 것이지, 내가 천재 작가가 아니고서야 웹소설로서는 좋은 방식이라고 하기 힘들다. 아무래도 작품으로 던지고 싶은 메시지들이 너무 많아서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
나중에 다시 이 게시글을 보게 될 미래의 내게 말한다.
처음으로 독자 후원을 받아 500원을 벌었던 순간, 처음으로 출판사 제의를 받아서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께 달려갔던 순간, 처음으로 추천글을 읽었던 순간, 지옥 속에서 빠져나와 무대 위에 올랐던 순간, 다섯 번째 작품의 완결 후기를 쓰던 순간을 떠올려라. 22살부터 25살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 것이다. 그러면서 얻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그것들은 전부 너의 강점이다.
그리고 여기 친절하게 정리해두었다. 당당하게도 써놨다.
너의 약점은 오로지 이 게시글에 있다. 그간 수많은 약점들을 고치고 고친 후에 마지막으로 남은 약점들이다. 다른 것들은 생각하지 마라. 그건 너의 특성이자 개성이자 색깔이다.
너는 천재가 아니라서 약점을 전부 고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작가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약점을 최대한 고치고 부족한 부분들은 강점을 강화하여 커버하길 바란다. 변함없이 독자를 사랑하고, 변함없이 너의 색깔을 잃지 말기를 바란다. 나보다 인생 경험이 더 많은 너일테니 반드시 최고의 결과로 증명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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