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집필에 필요한 고찰

웹소설 작품을 여덟 번 뒤엎었다.

FromZ 2022. 11. 21. 02:10
반응형

앉아서 진득하게 책을 읽는, 전통적인 문학을 즐기던 나로선 여러 방면에서 이입이 어려웠다.

 

하지만 상업성 있는 작품을 집필하기 위해서는 읽어보아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인기작들의 프롤로그와 초반 몇 가지 에피소드를 각각 해체분석적으로 읽어보았다. 그렇게 하다보니 벌써 노트만 20장을 넘게 썼다.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 방식대로 깨달은 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웹소설 시장은 최소한의 독해로 최대한의 대리만족을 주는 것이 주된 전략이다.

 

이미 최적화된 플롯, 소재, 집필 난이도와 독자의 진입 장벽이 낮은 트렌드가 있었고 그것을 작가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본 인기작의 방식들은 읽으면서 내게 수많은 의문점을 안겨주었다. 특히나 주인공의 감정선, 적응력, 목표설정, 사건에 대한 원인이 내게 끝없는 의구심을 안겨주었다. (가히 천재적인 소재를 썼다고 할 수 있는 일부 최상위 작품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작품이 그랬다.)

 

아래는 내가 9월부터 신작을 집필하며 겪은 도입부의 시행착오다.

또한 모든 시행착오 과정에서는 주변인으로부터의 조언과 편집자님과의 피드백이 오갔다.


Ver.1: 주인공은 지구, 대한민국, 현대인이다. 사고를 겪고 중세판타지 배경의 세계에서 기계의 몸으로 눈을 뜬다. 주인공은 현실에 있던 인연, 현실에서 이루어둔 성과, 그밖에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자신의 세계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부정하고, 울부짖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그리워하며 1개월을 보낸다. 그러다 끝내 생존과 탐색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단, 여전히 자신이 있는 세계가 진짜인지 자신의 망상이 만들어낸 세계인지 의심하며 말이다.

주인공은 어느 불 꺼진 시설에서 깨어났고 눈, 코, 귀, 입, 팔다리 따위가 없는 다면체의 기계였다. 그래서 먼지 쌓인 바닥과 벽에 내장된 전선을 자신의 신경계처럼 삼아서 감각기관을 대체할 수 있는 장비들을 확보해나간다. 시설 지하에 있던 스켈레톤 무리를 소탕하여 시설 전체를 장악하고 자신의 팔다리를 대신하는 로봇들을 지상으로 내보내 야금술과 철제 냉병기를 준비한다.

이후 전개는 주인공의 끊임없는 탐구(별자리, 동위원소분석 등) 시설이 오래된 고대 문명의 것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이곳이 다른 세계가 아니라 수천년 후의 지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마법이 있고 과학이 박해받고 있어 오랫동안 중세 기술력에 머무른 세계에서 자신의 과학기술을 펼치고 국가를 세우고 무역, 외교, 전쟁 등을 하는 이야기다. 평범한 주인공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시설에 현대(고대)의 데이터베이스가 있었고 주인공의 뇌가 기계로 대체되면서 지능지수가 특이점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Ver.2: 위와 같은 플롯에서 주인공이 초반에 받아들이는 과정을 생략했다. 이는 대다수 독자가 느끼기에 맛이 없는 부분이다.

주인공은 기계가 되면서 인격적으로, 감정적으로, 윤리적으로 비인간적인 내면을 가진다. 그래서 Ver.1보다 사람을 해치는 일에 망설임이 없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의심&분석하지만 그로 인하여 현대의 것들을 그리워하거나 괴로워하진 않는다. 즉, 주인공의 부정적인 감정을 제거한 것이다. 또한 Ver.1에서는 기술적인 고증을 위해 주인공이 무언가를 알아내고 활용할 때마다 설명이 들어갔는데, 이번 Ver.2에서는 그 설명들을 로그에 기록된 '상태창'으로 압축하여 독자에게 보여준다. 이때 내가 6화 분량을 엎으며 '상태창'을 넣겠다는 결단을 내리기까지 수많은 고뇌와 현자타임이 있었다.

 

Ver.3: 인격적, 감정적, 윤리적 내면이 비인간적인 주인공은 위험하다고 판단되었다.

하지만 주인공의 거침없는 행보과 빠른 적응은 필요하고 때로는 비인간적인 조치도 서슴없이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주인공의 과거사를 대단히 성공한 사업가이자 돈을 위해서라면 비인간적인 연구에도 투자를 하는 실리적 성향으로 바꿨다. 또한 주인공은 '교모세포종'이라는 병에 걸려서 냉동인간이 되었고 눈을 뜨니 이 세계, 기계의 몸이었다는 전개다. 나머지 플롯은 위와 같지만 각종 사건과 사물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주인공이 '레벨'과 '스킬'을 획득할 수 있게 되면서 기술적 고증 설명이 긴 일들은 스킬로 넘어가고, 적당한 고증이 필요한 일들은 상태창으로 설명을 압축했다.

이왕 할 거라면 제대로 하자는 생각에 엑셀을 파서 경험치 함수를 직접 만들고 각종 스킬에 대한 다양한 숫자적 부분까지 탄탄하게 준비했다.

고증을 원하는 독자들은 실제로 정보 대조를 통해 '아 그래서 이런 거구나', '이런 부분까지 신경썼구나'하며 넘어갈 수 있고 고증에 관심 없는 독자들은 상태창만 읽고 넘어갈 수 있도록, 한쪽이 지루해하거나 한쪽이 불편하지 않도록 구성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8화 분량을 대수술하면서 현자타임이 있었다.

 

Ver.4: 위와 같은 플롯, 같은 주인공 설정에서 도입부의 분량을 대폭 줄였다. 또한 주인공이 처음으로 눈을 떠서 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제거해버렸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주인공의 지능, 성격, 판단력, 윤리관, 목표설정의 개연성을 이야기로 풀어놓지 않아도 독자들은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당장 전개가 시작되지 않는 느낌에 지루하다고 안 읽을 리스크가 훨씬 크며, 작가인 내가 굳이 신경쓰인다면 나중에 천천히 풀어도 괜찮다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Ver.4의 주인공은 이미 적응을 끝마쳤고 성장과 탐구를 하는 단계인 것이다. 또한 시설 장악을 위해 지하의 스켈레톤을 토벌하는 전개가 거의 시작부터 나타나며, 시설로 침입한 외부인들을 설득하려다 끝내 소탕(주인공의 첫 살인, 연쇄살인)하는 장면까지 빠르게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의 죄책감, 윤리적 가치관, 감정선에 대한 묘사는 한 문장 내지 두 문장으로 축약했다. 그리고 이전까지 주인공에 대한 외부인들의 반응이 '흉악한 고대 문명의 잔재다! 당장 없애야 한다!'였다면 Ver.4에서는 '설마 고대 문명의 잔해인가? 너무 두렵고 무시무시한 힘이다!'라는 식으로 바뀌었다. 전개의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에 6화 분량에 대한 대수술이 진행되었다.

 

Ver.5: 극초반 도입부가 바뀌었다. 작품 방향성을 미리 알려주고 초반의 지루할 수 있는 탐구 과정을 기대감으로 전환하기 위한 장치다.

이미 기술 발전과 국가간의 군사적 동맹을 이룩한 주인공이 전장에서 '전열보병'들을 지휘하며 싸우는 장면부터 보여준다. 나중에 발생한 사건부터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 장교과 주인공 사이의 대사 속에 이 세계가 현대 지구가 아니라는 정보만 섞어주었다. 그리고 회상처럼 넘어간 2화부터는 주인공의 과거사가 거의 1페이지로 압축된다. 그마저도 불투명하게 기억이 휘발되어서 자신의 이름은 물론이며 부모의 얼굴까지 기억이 안 난다는 식. 이후 전개는 Ver.4와 같다. 이번엔 3화 분량에 대한 대수술이 있었다.

 

Ver.6: 9화 분량의 기존 설정과 세계관을 전부 엎어버렸다.

9월부터 내 뇌가 신작을 만들어야 한다며 여러 세계의 이야기들을 단편적으로 생성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상업적으로 개량하기 괜찮은 이야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Ver.4까지의 세계관과 주인공 설정은 내 실력으로 상업적 요소를 섞어 개량했지만 늘 어색한 느낌이 났다. 레벨, 스킬, 상태창을 다 넣고 주인공의 과거사를 제거했지만 그래도 이야기가 무거운 것이다.

어쨌거나 과학적, 기술적 고증이 주축을 이루는 이야기가 되면 나는 진지해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Ver.6의 이야기는 여기서 말할 수 없다. 이쪽 이야기로 가자고 노선이 잡혔기 때문이다. 주인공에게 특수성을 부여하고 이를 상태창으로 압축설명하고 레벨을 통해 보상심리를 자극, 최대한의 대리만족을 유도하는 장치는 이전 버전과 같이 그대로 가져왔다.

 

Ver.7: 이전 버전에서 딱 하나만 바꿨다. 원래는 주인공이 이 세계의 오리지널 인물이었는데, 상업성(쉬운 몰입)을 위해서라면 주인공을 현대인으로 설정해야만 했다. 도대체 왜, 굳이, 개연성의 문제를 품고 현대인으로 해야만 하는가.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1화에 수많은 비판&비난 댓글을 달고 있는가. 그렇게까지 현대인으로 하는 것과 오리지널로 하는 것에 큰 차이가 있는가. 주변의 조언을 듣고 다른 작품들을 더 읽어봐도 나는 주인공이 현대인이어야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의 특징은 내 작품들보다 압도적으로 수요가 많다는 것이다. 나 또한 상업성을 위해서라면 객관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만 모르고 모두가 아는 것이기 때문에, 인기작을 쓴 작가들의 선택을 본받아서 내게도 적용하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그래서 빙의, 환생(전생) 중에 고민하다가 현대인인 주인공이 완벽한 적응을 끝내기 위한 개연성이 걸려서 환생으로 했다. 현대인이었던 주인공은 이 세계에서 0살부터 시작했고, 독자들은 주인공이 성인인 시점부터 이야기를 볼 수 있다. 현대인이었지만, 이 세계에 대한 학습과 적응이 한참 전에 끝난 주인공을 보는 것이다.

 

Ver.7.5: 그러나 여전히 초반에 확 터뜨리는 무언가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써왔던 작품들의 도입부처럼 천천히 우상향을 하며 흥미를 높이는 초반이 된 것이다. 이는 곧 3화 ~ 5화 사이에서 도입부의 흥미가 절정을 이룬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이 2화는커녕 1화만 보고 나갈 수도 있다. 숙련된(?) 독자라면 첫 페이지만 보고도 나갈 수 있었다. 현실이 그렇다고 한다. 나는 초반 흥미가 우상향이 아니라 남성의 오르가슴처럼 일직선으로 천장을 뚫어야 한다고 마인드를 바꿨다.

그래서 전개의 순서를 앞당기고 각 전개와 전개 사이의 분량을 줄여서 2화에 걸쳐 진행될 이야기를 가급적 1화에 담도록 했다. 아무래도 첨삭되고 압축되었기 때문에 세계관 디테일과 묘사는 전보다 떨어졌다. 하지만 초반에는 무조건 재미와 흥미가 중요하므로 그 정도의 품질저하는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아니, 올바른 관점에서는 오히려 이것이 품질상승이다.

 

Ver.8: 연속되는 퇴고 속에서 도입부가 끊임없이 변형된 끝에 Ver.7.5와는 다른 내용이 되었다. 엎거나 대수술을 했다기 보다는 계속 하나씩 수정하다보니 Ver.8이 되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9월부터 깎기 시작한 신작은 이번 버전의 세계관과 전개로 갈 것이 확실해 보인다. 나의 기존 독자분들이 도입부만 지나면 '아, 그래도 이 작가가 쓴 작품이 맞구나'하며 따라와주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여러모로 회의감이 들었다. 배우고 적응하고 적용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거부감 있던 관점을 바꾼다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마치 나만 정상이고 세상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정신병자가 된 감각이었다. 다행히 얼마 전부터는 날 내려놓고 세상을 받아들인 상태다.

 

그런데 여전히 신작에 애착이 가질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지금까지의 작품들은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서 했다면, 이번 작품은 시작부터가 '돈'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번 집필의 성취감은 이야기를 끝맺었을 때가 아니라 통장에 쌓이는 금액을 보며 느껴야할 것 같다. 정말로 일을 하는 것처럼, 세상에 많은 직종의 종사자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어려운 도입부를 끝내고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자연스럽게 잃어버린 애착이 생기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번 작품은 당연히 상업성에 중점을 둔 만큼, 초반 성적이 좋지 않다면 연재 중단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실패하게 된다면 정말 힘들 것 같다. 이런 일을 두 번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진다.

어떤 친한 형은 이 신작에 낭만이 없다고 했는데, 글쎄다. 장르문학에서 낭만이라는 게 작가에게 있어 경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낭만과 상업성을 동시에 챙기기엔 내 실력이 너무도 부족함을 통감한다.

 

올해 5월부터 공부하고 발로 뛰면서 경험을 쌓았던 부동산 레버리지는 시기상 미루게 되었다.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덕분에 나는 드문드문 부동산 시장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신작에 열중하는 중이다.

 

이 작품이 대성공하진 않더라도 실패없이 내게 돈과 시간을 벌어다주기를 바란다.

그래야 아직 꺼내지도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쓸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집필 외에도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도전해볼 수 있으리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