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째서 부자가 되려고 하는가?
결론부터 생각하자면, 나는 만들고 싶은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창작과 창조다. 나에겐 수많은 아이디어가 있고 그것이 생각날 때마다 목록화하고 있다. 하나의 아이디어 밑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명의 나무처럼 끝없이 뻗어나간다.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나의 두뇌는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할 수가 없어서 가장 오래된 것부터, 가장 덜 자극적인 것부터 천천히 휘발시킨다.
원래 나는 그런 생각들을 어딘가에 적어둠으로써 휘발되는 것을 막곤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다보니 이것을 실현하고 진짜로 만들어서 세상에 남기고 싶다는 열망이 조금씩 차오르는 게 아닌가. 군대 도서관에서 읽은 수십 권의 책이 배경지식이 되어서, 이후 4년간 수없이 자기계발을 하면서 더 많은 배경지식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영감이 떠오르는 빈도가 더 높아지고 있다.
이는 내게 축복이자 저주다.
세상이 놀이터가 된다면 이보다 큰 축복이 없을 것이다. 내 의지와는 별개로 나의 두뇌가 영감을 생산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말 시도 때도 없다.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뭔가가 떠오르고, 이동수단에 탑승하여 긴 시간 창밖을 보고 있으면 아주 그냥 혼자서 영화를 찍고 대서사시를 구상하고 있다. 잠을 잘 때조차 여러 개의 인격이 내 두뇌를 들락날락하며 저마다의 사고방식과 상상을 이야기한다.
정말로 축복이자 저주다.
이것 때문에 정의하기 모호한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정신을 넘어서 신체나 일상에도 영향을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이것을 해소하지 못하면 결국 나 자신의 정신을 좀먹는 저주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잡아먹는 기분. 내 두뇌가 토악질을 하는 기분.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는지, 어떤 감정선을 가진 인간인지 혼란스러운 상황에 이따금씩 잠식당한다. 특히나 밤이 되어 눈을 감고 있으면 그것이 극단적으로 심해진다. 물론 가장 강력하고 주도권 있는 인격과 사고가 나를 정의하며 통제하고 있지만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적인 가면을 쓰는데, 나는 그 가면이 너무 많다는 느낌이다. 끝도 없이 생겨나고 끝도 없이 소멸하고, 가면인데 모순적이게도 얼굴 가죽의 안쪽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어휘가 있다면 좋겠다.
어쨌든 이 저주를 축복으로 만들기 위해선, 해소가 필요하다.
맛있는 식사, 재밌는 게임, 명상, 휴식, 쾌락, 보상회로, 사치, 사랑, 여가, 취미.
무엇을 말하든지 그런 것들로는 이 종양 같은 복주머니를 결코 풀어내지 못한다. 그런 것들이 점점 더 눈에 들어오질 않게 되었다.
끊임없이 영감이 떠오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세상에 말했다. 혹은 세상에 선보였다.
만약 내가 과거의 누군가들처럼 무언가를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보다 비극적일 수가 없다.
(더 심각한 건, 수명연장의 기술이 비약적으로 진보하지 않는다면 나는 죽기 전에 모든 것을 해소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무리 부자가 되고 아무리 시간이 많아져도 말이다. 그 정도로 영감이 많고, 너무 자주, 오래 떠올라 뒤섞인다.)
인간은 먹고 자고 입어야만 한다. 실물을 만들기 위해서 공장이 필요할 수도, 기업이 필요할 수도 있다. 내게 부족한 어떤 분야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사람을 써야할 수도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시간도 필요하다.
돈은 시간을 벌고, 시간은 돈을 번다.
하지만 시간을 벌 수는 없는 법. 수명이라는 게 있는 한 시간을 번다는 개념은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벌어야 비로소 시간을 벌 수 있다.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을 말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핵심은 그것이다.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돈을 창조와 창작의 도구로 삼는 것. 그리고 다시 그 돈으로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를 반복하는 것. 세상에 나의 것들을 쏟아내고 해소하는 것.
나는 그런 축복 받은 인생을 살아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저주에 걸렸다.
미래에 보게 될 너에게, 이건 25살의 가장 주도권 있는 네가 말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