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포드(거신) 거대다족보행병기 고증
(2019.10.5)
트라이포드형 다족보행거대병기. 이하 거신.
거신의 이점은 적들의 시선을 끌고, 경우에 따라서 적들에게 공포감을 선사하고, 우월한 높이에서 전장의 엄폐물 대다수를 무시하고 적들에게 지대지 폭격을 선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단점이 더 많다.
적들의 시선을 끌기 때문에 집중공격을 받기 쉽다.
투입된 자원과 기술이 많은 고급 병기가 적들의 공격에 쉽게 노출된다는 걸 어느 지휘관이 좋아할까.
또한 집중공격을 받기 쉬운데, 설계상 안정성과 내구도가 심히 떨어진다. 예를 들어 장갑차의 경우 포탄 몇 대에 장갑이 뚫려도 괜찮지만 거신의 경우 다리의 부품이 하나라도 손상된다면 그대로 기동력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또한 아군 쪽에서 쓰러질 경우 도리어 아군을 깔아뭉게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기동은 다른 병기에 비해 비효율적이다.
아주 긴 다리로 보행을 하기 때문에 험준한 지형을 모조리 돌파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험준한 지형은 무한궤도 바퀴로도 돌파가 가능하고 그보다 험준한 지형이라면 그냥 비행 능력을 갖춘 병기를 투입하는 편이 낫다. 심지어 작중에 반중력 기술이 있다면 당연히 반중력 기술을 갖춘 병기가 투입되는 편이 더, 더 좋다.
높은 위치에서 엄폐물을 무시하고 지대지 폭격을 가하는 건 억지스러운 이점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는 공군과 포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공군과 포병이 이러한 거신보다 훨씬 파괴적으로, 더 빠르게, 더 낮은 리스크로, 더 넓은 작전 범위에 화력을 집중할 수 있다.
그러니 향후 내 작품에서 거신을 운용하기 위한 조건이 필요하다.
1. 다리가 너무 얇아선 안 된다.
2. 반드시 보행하는 게 아니라, 필요하다면 비행까지 할 수 있어야 한다. y축이 긴 병기이므로 유선형을 따른다면 공기저항에 큰 손해를 보는 건 아니니까.
3. 위에서 언급한 비행 기능뿐만 아니라 우주에서도 운용이 가능할 정도로 하자. 이러면 안전한 우주에 있다가 유사시에 자체적으로 전장(행성)에 투입되어서 스스로 험지를 돌파하고 기습하여 압도적인 화력으로 하여금 전선을 밀어낼 수 있는 비상용 병기. 결전병기가 된다.
4. 동시대 다른 병기들에 비해서 압도적인 화력을 갖추도록 하자. 압도적인 화력을 갖출 수 있는 이유는, 3번 조건에서 언급했듯 우주를 누비다가 행성에 투입되어서 싸울 수 있을 정도의 동력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3번 조건을 지키면 4번 조건도 가능하다.
5. 화력을 더, 더 추가하자. 동력원이 갖추고 있는 화력에 더하여 미사일이나 포탄 형식의 대량살상병기(핵무기 같은 것)로도 중무장을 하자.
6. 절대 단독으로 운용하지 말자. 단독으로 운영하면 쓰러뜨리기 좋은 표적이 될 뿐이다. 반드시 주변에 거신을 보호하는 다른 병력&병기들이 있어야 한다.
7. 위에서 언급한 현실적인 제약은 모두 인간의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므로, 이러한 병기를 주력으로 삼는 집단은 지상전과 화력에 심취한 외계 세력으로 하자. 아니면 종교적인 이유나 병기 진화의 역사적 이유에서라도 좋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퀴와 발사병기 주력의 역사가 있는 인간이 이런 비효율적인 병기를 다수 주력으로 운용한다는 건 절대 납득이 되지 않으므로.
근데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고 치면, 전투 목적이 아니라는 가정으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병기는 병기인데 적들과 직접 전투를 벌이는 병기가 아니라는 느낌으로 후방에 배치해서...?
위 내용은 2019년의 내가 작성한 것이고.. 거신을 운용하기 위한 외계 문명의 시나리오가 갑자기 떠올라서 적어본다.
요소: 환경, 역사, 기계적
이들 종족은 중력이 매우 약한 행성에서 진화해왔다. 이들 종족의 원시적인 지상전에서는 바퀴가 달린 전차나 속도가 빠른 기병과 같은 기체를 조종하기 어려웠다. 군사가 행군을 할 때는 신속함보다, 낮은 중력으로 인해 높게 자라난 숲 속에서의 은밀함이 중요시되었다. 키가 큰 삼족보행 토착생명체를 말처럼 운반수단이나 군사용으로 가축화하였고 수성하는 자들은 보다 높은 성벽을, 공성하는 자들은 보다 높은 토착생명체를 개량하고자 경쟁했다. 그러나 너무 키가 큰 토착생명체는 숲 속에서 은밀하게 이동할 수 없었고 그때부터 이들의 군대는 은밀함을 포기하는 대신, 토착생명체의 등 위에 더 넓은 마루를 얹어서 더 많은 대포와 궁병들이 짧은 순간에 최대의 화력을 퍼부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수성하는 자들은 숲에 불을 지르고 바위를 굴려 토착생명체의 가느다란 다리를 부수는 등 다양한 전술을 선보였다. 냉병기보다 발사병기가 주력이 되면서 지상의 보병들은 그저 토착생명체의 다리를 지키는 방패병이자, 적들의 공군을 저지하는 요격자들로 역할이 대체되었다. 발사병기의 화력이 더욱 강해지고 자동화되면서 높은 성벽이 의미가 없어지자 한 점에 불과했던 전장은 길게 늘어선 전선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전선 속에서 토착생명체를 모방한, 보행하는 전쟁기계들이 활약했다. 보행하는 전쟁기계들은 기존에 갑옷을 덕지덕지 붙인 토착생명체보다 빠르고, 높고, 단단하고, 유지가 쉽고, 취약한 다리를 잃게 되면 새로이 모듈화된 다리를 끼워서 신속하게 수리 후 재투입할 수 있었다. 더 빠르고 강한 공군의 등장에 보병들의 요격 능력은 덩달아 상승했고 낮은 중력 속에서 포병들은 상당한 범위의 코리올리까지 계산하여 대륙과 대륙 사이를 포격했다. 그렇게 화기의 화력이 병력의 내구성을 압도하는 과도기가 찾아오면서, 이들 종족의 군대는 보행하는 전쟁기계들을 더욱 크게 만들어 장갑을 두껍게 하고, 무거운 포신까지 붙였다. 역사적으로 바퀴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폭격과 포격으로 꺼진 울퉁불퉁한 땅 위에서 무한궤도 방식을 쓴다는 발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이들에게 크고 강하고 화력이 압도적인 전쟁기계란 곧 국력의 상징이었다. 결국 과도기가 지난 후 이들 종족은 전쟁기계를 최소한의 병력으로 호위하되 전체적인 군대는 산개하여 기동하는 전술이 보편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공격하는 측과 방어하는 측 모두 수많은 전쟁기계를 다뤘으며 그러한 전쟁기계들이 각각의 전장에서 이동하는 기지이자, 깃발이자, 포병이자, 막사이자, 지휘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요소: 환경, 진화, 생물학적
이들 종족의 행성은 모든 대륙이 저위도에 위치하고 있다. 매일마다 몰아치는 폭풍, 소나기, 울창한 숲과 끝도 없이 이어진 습지가 이들에게 가장 익숙한 환경이다. 습지에는 끔찍한 독충, 독초, 질병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이들은 나무 위를 땅으로 삼았다. 사지가 있지만 사지에 붙은 것은 모두 손톱, 발톱이었고 꼬리 역시도 나뭇가지를 단단하게 붙잡는 갈고리의 역할을 했다. 손가락이라는 게 없던 것이다. 진화를 거듭하니 꼬리가 약한 것들이 죽고 꼬리가 두꺼운 것들이 살아남았다. 손톱과 발톱이 긴 이들은 먹잇감을 보다 쉽게 사냥하여 수를 늘렸다. 그러던 중 빙하기가 찾아왔다. 대다수의 동식물이 아사하거나 동사했다. 나무 위의 열매를 잃어버린 이들은 먹잇감을 찾아 지상으로 내려왔다. 습지는 단단하게 얼어붙었고 얼음층 아래에 생존한 독충들이 유일한 먹잇감이었다. 독충을 먹고 살아남은 것들이 자손을 낳아 독에 대한 내성을 갖추었다. 손톱과 발톱이 짧은 것들이 독충을 더 잘 포획했다.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강력한 꼬리로 얼음층을 깨부쉈다. 식사량이 줄면서 신체는 칼로리 소모가 적은 쪽이 유리하여 움직임이 느려지고 근육량이 줄어서 사지가 얇아졌다. 자연히 이들의 손톱과 발톱은 짧아지다가 손가락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되었고, 꼬리는 다리와 비슷한 길이가 되었으며, 끝내 다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무언가가 되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진화가 거듭되면서 지능지수가 높아지고 식량에 대한 원초적인 문제가 해결되자 암컷과 수컷은 점점 복잡한 번식 조건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임신 중에 세 다리를 모두 써서 보행하는 암컷은 두 다리만 쓰는 암컷들보다 적게 먹고 결코 넘어지는 일이 없었으며 유산을 할 확률까지 상대적으로 낮았다. 수컷들은 이렇게 삼족보행을 하는 암컷을 우아하다고 여겼고, 빙하기의 차가운 폭풍을 경계하는 암컷들은 다리가 긴 수컷의 몸 밑에서 보호를 받고 싶었다. 그래야 자기 밑에 있을 자손들까지 3중으로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다리가 길고 삼족보행이 안정적인 개체들이 종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더욱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들의 원시적인 전쟁은 언제나 국지적이었다. 대규모 병력이 충돌할 수 있는 공터나 평지가 없었고 애당초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유목 생활을 했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을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인구수조차 확보되지 않았다. 혹독한 환경은 각 집단의 소통을 어렵게 하여 한 지역에 지나치게 많은 군소 문명들이 탄생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모든 문명이 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에 문화와 언어는 서로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은 인구수, 비슷한 언어, 문화, 소박한 문명. 이들에게 전쟁이란 극한까지 치닫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감정적인 수단일뿐 결코 문명의 도구가 되지 않았다. 전쟁을 해서 얻는 것은 극히 적은데 잃을 것은 너무 많았던 것이다. 또한 달릴 수 없는 느릿한 몸짓과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울림을 일으키는 신체는 냉병기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손톱, 발톱을 모방한 냉병기가 있었지만 오래 사용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멀리서 적들을 마주침과 동시에 교전을 시작할 수 있는, 탄성을 이용해 바위를 날리는 병기가 빠르게 등장했다. 바위를 날리는 병기는 총탄을 퍼붓는 병기가 되었고 땅울림이 적들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적들을 최대한 살상하는 화력이 중요시되었다. 그래봤자 이들의 기나긴 역사에 전쟁은 백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직접 싸우는 전쟁보다는 오히려 기술력과 군사력을 키워 상호확증파괴를 유도하는 냉전의 구도가 수천 년간 이어졌고, 더 많은 포탄을 날리는 병기, 더 강력한 탄도무기, 광학병기까지 개발되면서 이들은 경쟁적으로 더 긴 사거리와 짧은 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강력한 화력을 갖추려고 했다. 더 긴 사거리와 단위시간당 더 끔찍한 화력을 집중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집단이 이들의 국제사회에서 발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밖에 다른 요소, 키워드.
1. 종교적으로 거신을 신성시한다. = "아무튼 거신이 최고야."
2. 원래 바닷속 문명이라 역사적으로 보행을 채택하고 모든 병기가 부력의 도움을 받았다. = "비행? 포병? 그게 뭐냐? 바퀴는 알지. 부품으로 쓰는 거잖아."
3. 산소가 풍부한 곤충 문명이라 관습적으로 거대화되었다. = "아무튼 큰 게 강한 거잖아. 우린 계속 그랬어."
4. 폭풍과 안개가 심하여 과거부터 공군과 포병 운용이 어려웠다. = "참호에 숨은 적들의 머리를 공략해야지."
5. 천연의 흑색화약의 재료가 부족하여 냉병기와 광학병기 사이에 화약병기라는 기술적인 구간이 스킵되었다. = "무기는 무조건 직선으로 쏘는 거 아니냐? 그러면 당연히 사선도 높아야지. 이건 움직이는 망루라고!"
6. 습도가 너무 높아서 화약을 쓰기가 어려웠고 기술적인 구간이 스킵되었다. = "미사일은 너무 비싸. 어쨌든 진군은 해야지. 키가 크면 피격범위도 커져? 건물이나 나무를 엄폐물로 삼으면 되잖아."
7. 모종의 루트를 통해 우월한 문명의 기술을 얻는 바람에 전쟁병기의 과도기를 겪는 중이다. = "이게 가장 최적화된 병기 아니었냐?"
8. 우주에서 진화한 종족이다. = "우린 정지궤도의 운석을 오가면서 싸워왔어."
9. 거신은 전쟁 목적으로 설계된 병기가 아니다. = "우린 도시에 있는 네놈들을 사냥하러 왔다! 건물이나 지하에 숨을 생각은 하지마라!"